2013년 4월 26일 금요일

행복을 원한다면 성령과신부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교회를 찾으세요


하나님의교회의 자랑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것 같아요.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많이 일어나는 이때에도 하나님의교회는 성령과 신부이신 아버지 안상홍님과 어머니하나님의 가르침대로 늘 바른생활을 하고 세상의 빛가 소금의 역할을 하다 보니 세상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고 있는것 같아요.

이모든건 단연 성경의 예언 성취이지요.

하나님의교회는 총회장 김주철목사님을 기준으로 해서 모두가 한맘으로 하나님의 엘로힘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함이죠.

하나님께서 이시대에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새언약의 절기인 안식일, 유월절등 3차7개 절기를 지키는 것이고 여성도들은 예배나 기도시 머리수건을 쓰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단에 의해 변개된 일요일예배와 크리스마스를 지키고 십자가를 세우는 어리석은 자들을 보면 안타까워 한숨이 절로 납니다.


이제는 무너질 바벨론에서 나와서 부디 안전한 도피처인 예루살렘 어머니하나님이 계시는 시온으로 나오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안상홍님의 부르심에 어머니하나님의 부르심에 이젠 아멘하고 달려 나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때인것 같습니다.


2013년 4월 25일 목요일

고해성사의 정체를 밝히다-하나님의교회-안상홍님

신부님과의 밀어(密語), 고해성사


가톨릭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일 가운데 종종 영화 소재로 등장하는 게 있다. 칸막이나 커튼으로 가려진 고해소에서 이루어지는 신부와 신도 간의 비밀스러운 대화, ‘고해성사’다.

가톨릭신도들이 때론 낯부끄럽기까지 한 자신의 치부를 신부에게 실토하는 이유는 신부가 하나님을 대신해 죄를 사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 고해성사로 인해 또다시 죄를 짓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모고해’라는 교리 때문이다.

모고해란, 고해성사를 하면서 죄를 감추거나 축소하여 고백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인터넷에서 모고해를 저지른 어느 가톨릭신도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요지는 이렇다.

“주일미사를 빠져서 고해성사를 했다. 그런데 여전히 죄책감이 들어 괴롭다. 사실 저녁미사에는 참석할 수 있었는데 지인들과 부딪히는 게 싫어 일부러 안 갔다. 그런데 신부에게는 그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결과적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해성사를 했는데 또다시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이 글을 보며 ‘어쩌다 신부가 아닌 인터넷상에 고해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하는 딱한 심정이 드는 한편, 시지프스가 생각났다.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았다던 신화 속 주인공 말이다. 가혹하게도 그에게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순간,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다시 밀어올려야 하는 형벌이 끊임없이 지속된다. 죄와 벌이 되풀이되는 모양새가 참 많이도 닮지 않았는가.

고해성사에 대해 알아보니 생각보다 까다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죄를 사함받는 ‘보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총 5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첫째, 지은 죄의 종류와 횟수를 알아내고(성찰) 둘째, 알아낸 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아파 뉘우쳐야 하고(통회) 셋째,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야 하고(정개) 넷째, 알아낸 죄를 사제 앞에 가서 고백하여야 하며(고백) 다섯째, 사제가 정해주는 선행이나 기도를 해야 한다(보속).

이것들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죄를 사함받을 수 없단다. 이렇듯 가톨릭은 죄에 대해 철두철미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몸부림친다. 그런데 되려 가톨릭 지도자들이 신도들보다 더 중한, 경악을 금치 못할 죄를 저지르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금에 벌인 가톨릭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인터넷은 물론, 역사책 목록만 대충 훑어봐도 파악이 될 정도로 흔하고 유명하다. 역대 교황들 중에는 자신들을 일컬어 ‘가장 거룩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면서도 행위는 독재자에 버금가는 권세를 휘둘렀던 자들이 부지기수다.



인노첸시오 3세는 종교재판소를 창설하여 백만 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우르바노 8세는 진실을 말하는 갈릴레이를 정죄했다. 세르지오 3세는 창부정치의 선구자였다. 알렉산데르 6세는 뇌물을 주고 교황 자리를 차지한 자로 교활하고 잔인한 사상 최악의 교황으로 불린다.

요한 12세의 주요 행적은 싸움, 살인, 방화, 사냥, 도박, 간음이었다. 그가 많은 정부들에게 준 선물은 성베드로성당에서 약탈한 물건이었다. 그는 신성모독, 성직매매, 위증, 살인, 간음, 근친상간으로 소환되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자신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혀, 코, 손을 자르는 등 피의 복수를 자행했다. 그러나 얼마 후 최후를 맞이했다. 원인은 유부녀와의 간음 때문이었다. 간음현장에서 붙들린 그는 유부녀의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했고, 이때 입은 부상으로 며칠 뒤 사망했다.

가톨릭 지도자들의 타락상은 여전하다. 2011년 케냐에서는 한 신부가 6살 여아를 성폭행해 마을 사람들을 화나게 했고, 베냉의 대주교가 성폭행 혐의를 받고 사임했다. 2009년에는 주교가 20년간 한 30대 여성을 성폭행해 온 혐의로 직위해제됐다. 심지어 브라질의 한 사제는 8명의 남자아이를 성폭행한 혐의로 다른 나라로 배치됐다. 미국 보스턴의 민간단체 웹사이트에는 아동 성추행 전력이 있거나 혐의를 받은 2900명의 가톨릭 사제와 주교들의 명단이 올라있다.

신도들의 죄는 그리 엄하게 단속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왜 저런 흉악한 일을 범하는 것일까? 성폭행, 동성애, 살인, 간음, 근친상간은 차마 입에 담기도 뭣한 추악한 ‘죄’다. 성직자는 고사하고 평신도나 일반인이 저질렀다고 해도 돌을 던지고 싶을 만큼 역겨운 ‘죄’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십계명 중 여섯 번째, 일곱 번째가 살인과 간음을 금하는 계명이다. 일찍이 가톨릭은 십계명을 수정한 바 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둘째 계명은 없애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넷째 계명은 “주일을 지키라”고 수정했다. 살인과 간음을 금하는 계명을 건드리지 않은 건 나름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그런데도 어긴 건가?

가톨릭 지도자들이 저지른 죄들! 사람을 죽인 죄, 음행한 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십계명을 어긴 죄,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고 주무른 죄! 그들의 많고도 크나큰 죄악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해한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지금까지 카톨릭을 사랑의 전령사로 여겼으나 이젠 낱낱이 그 정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재림그리스도 안상홍님께서 재건하신 하나님의교회에서 카톨릭(바벨론)의 정체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성도를 괴롭게 하고 하나님의 때와 법을 바꾼 카톨릭의 하는 행위들은 반 그리스도적인 행동들입니다.
이젠 무너질 바벨론에서 나와서 시온으로 도피해야 할 때입니다.


출처:패스티브닷컴

2013년 4월 12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의 정통성

하나님의교회의 정통성
하나님의교회 역사는 기독교회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기독교회사가 곧 하나님의교회 역사임을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마가복음 1:1~10)

기독교의 시작점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부터다. 당시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믿었다. 유대교는 그들 고유의 신앙으로 뿌리가 깊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구원자라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기독교는 신흥종교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치부하며 배척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유대인들의 섣부른 판단으로는 예수님만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자연히 몰락할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사형을 하루 앞둔 날 마가의 다락방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 언약의 법을 세워주셨다. 이날이 바로 우리들이 최후의 만찬으로 알고 있는 ‘유월절’이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7, 19~20)

유월절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로마와 유대인들의 결탁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유대인들은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수장의 죽음으로 무리들은 당연히 흩어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열정으로 불타게 했고 결국 120명의 사도들은 유럽과 아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본격적인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실질적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건물이라는 형태를 갖춘 것은 AD 100년이 넘어서다. 그전에는 House-church(가정예배)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로마의 박해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수중에 있었다. 로마는 태양신을 섬기던 다신교 국가로, 최고의 권위가 황제였다. 로마 시민은 누구든 국가의 모든 일에 복종해야 했다. 물론 기독교인들 역시 국가에 충성했지만 한 가지,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눈엣가시였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국가 통합의 목적으로 여러 신들과 함께 황제에게도 예배하는 종교가 성행했는데,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결국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 탄압정책을 펼쳐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초대교회는 대체로 House-church를 유지하며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그렇다고 교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에 있는 교회로 편지를 보내며 교회 명칭을 언급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고린도전서 1:2)

로마의 탄압을 피해 가정으로 전전하며 예배를 드렸던 초대 기독교, 그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교회다. 즉,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교회의 역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는 로마의 눈을 피해 믿음을 지켰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의 탄압은 갈수록 거세졌다.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재위 기간 54~68년)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학살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해가 지면 등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기간 284~305년) 황제 때에는 칙령을 반포해 기독교인들의 예배소를 헐고, 성경을 불태우며 기독교인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채찍질을 당한 뒤 피에 굶주린 맹수의 밥으로 던져지거나 화형을 당하고, 사지가 찢기는 등 끔찍하고 야만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시신은 방치되었다가 불에 태워지거나 강에 던져졌다.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정부의 위력으로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지하무덤)에까지 숨어 들어가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켰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탄압을 피해 예배드렸던 장소, 카타콤.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내놓은 종교정책은 ‘종교의 자유’였다. 로마는 종교적 관용책을 펼치며 타 종교에 대해 묵인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단지 로마의 정치성향일 뿐이었다. 통치 차원에서 로마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으나 언제든지 필요하면 특정 신앙을 박해하거나 탄압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바로 기독교였다.

갈수록 거세지는 탄압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로마제국 전체로 전파됐다. 처음에는 평민이나 노예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나 점차 상류층에서도 하나 둘 기독교를 믿는 무리가 생겨났다. 상류층의 입교는 기독교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 무렵부터 신도들이 모이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3세기 말 무렵에는 전체 로마 인구 중 10%가 기독교인이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박해를 견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더없는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와 함께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던 갈레리우스는 311년 임종 직전 기독교를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했다. 기독교의 승리였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다음 해에 찾아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모든 기독교도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비로소 기독교는 347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이르러 국교로 인정받았다. 탄압의 세월을 보내고 찾아온 눈물 겨운 결실이라 볼 수 있지만 사실 이 역사는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교리가 이교도화돼버린 것이다.

이 무렵 하나님의교회 즉 기독교는 서서히 파벌이 생겼다. 성경대로 행해야 한다는 동아시아 교회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묵인해도 된다는 로마교회였다. 결국 로마교회는 인본주의라는 독단적인 길을 가게 됐다. 반면 동아시아 교회들은 성경을 위주로 하는 신본주의 사상을 고수했다. 두 지역 교회의 교리 논쟁은 AD 155년 유월절 논쟁으로 촉발됐다. 로마교회 지도자인 아니케터스와 동아시아에 있던 서머나교회 감독인 폴리카르푸스(폴리갑)가 서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각자 유월절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로마교회는 성경대로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성력 1월 14일 저녁에 행하던 성찬식을 부활절에 같이 실행했다. 이런 로마교회의 새로운 관습은 성경대로 행하던 다른 지역 교회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이후 197년 로마교회 감독이었던 빅터가 ‘도미닉의 규칙’이라는 법을 만들어 모든 기독교에 유월절 성찬식을 부활절에 하도록 강요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들은 빅터의 결정에 따랐지만 동아시아 교회들은 모두 거부했다. 동아시아 교회 중 에베소교회의 감독 폴리크라테스는 빅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사도 빌립, 사도 요한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이 1월 14일을 유월절로 지켰으며 8대 감독인 자신도 전임 감독의 가르침대로 유월절을 지킨다고 강조했다.


결국 유월절은 AD 325년에 폐지됐다. 두 교리 간의 역법(曆法) 차이로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교리의 이교도화가 가져온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급격하게 로마교회의 교리는 변질됐다. AD 321년 일요일 휴업령으로 성경의 안식일을 버렸고, AD 354년 크리스마스를 유입시켰으며, AD 586년 십자가상을 도입했다.

교리의 변화와 함께 논쟁이 거세질 즈음 군사적 약화와 내부적 혼란을 겪고 있던 서로마 제국으로 게르만계의 여러 부족이 대규모로 이동했다. 4세기 말 훈족의 서진(西進)에 자극을 받은 게르만민족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제국 각지에 정착하면서 여러 부족왕국을 건설했다. 이 시기 비록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로마교회는 건재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으로 수도를 옮긴 뒤 서로마가 멸망하기까지인 약 100년 동안 로마교회는 나름대로 살 방법을 모색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후 여러 미개한 부족들은 왕국의 번영을 위해 로마교회와 손을 잡았다. 그중 재빨리 로마교회로 개종한 프랑크왕국은 처음부터 로마교회를 옹호하므로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로마교회에 정면으로 반대하던 나라 중 세 나라(헤룰리, 반달, 동고트)는 로마감독의 농간에 차례차례 멸망당하고 말았다.

성경적 진리를 버리고 이교도의 길을 걷고 있던 로마교회는 다른 게르만민족들을 포교할 목적으로 우상을 세우고, 교회를 웅장하게 꾸미기 시작하며, 타 민족의 풍습을 더욱 과감히 받아들였다.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처럼 등장하는 교회지붕, 스테인드글라스, 촛불, 성상숭배 등을 들 수 있다.

로마교회의 위상은 이때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급기야 506년에는 동로마 황제까지 정책적으로 로마교회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로마교회의 감독을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칙령을 반포하는 한편 591년 ‘교황’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천주교황의 탄생이었다. 기독교의 세속화는 결국 종교적 괴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대는 로마카톨릭이 지배하는 종교 암흑시대로 치달았다.

AD 538년 교황은 적대 세력이었던 아리우스파의 동고트를 정복함으로써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게 됐다. 그 종착점은 1798년 프랑스 혁명군이 교황 피우스 6세를 발렌스 성으로 유배시킨 때까지다. 이제 참다운 기독교인 하나님의교회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도 사라진 후 교회는 교황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로마카톨릭의 부패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교황직의 매매와 세속적 권력, 축첩, 간음, 사치, 정적 살해 등의 비리는 특정한 때, 특정 교황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의 음란한 생활은 속담과 풍자로 민중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급기야 교황 레오 3세 때는 죄에 대한 벌을 사면해준다는 조건으로 금전이나 재물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면죄부’가 그것이다. 800년경에 판매가 시작된 면죄부는 15세기에 발행량이 급격히 늘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이처럼 천주교가 부패의 일로를 걷고 있을 무렵, 독일의 광산 노동자에게 한 아들이 태어났다. 신학 교수를 거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을 만든 사람, 바로 마르틴 루터다.

루터는 어느 날 수도사인 존 티첼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동전이 그릇에 떨어져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루터는 티첼의 면죄부 판매에 분개했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보며 실망했던 그는 당시 대주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의 전 생애가 회개 과정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라며 반박문을 보내고 교회의 문에 95개조에 달하는 긴 서한을 내걸었다. 비로소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 후 프랑스의 칼뱅, 스위스의 츠빙글리 등 다양한 종교 개혁가들이 등장했다. 천주교에 뿌리를 두고 있던 이들은 종교개혁과 아울러 천주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신교다. 천주교에서 분리되어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교리적 측면에서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대중들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하나님을 믿는 곳이라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정통 기독교는 천주교나 개신교가 아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새 언약 유월절을 세워주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리라’ 하신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교회다. 사도들도 다녔으며 그의 제자들도 죽음을 불사하고 지켰던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 정통성을 고수하며 초대교회 사도들의 믿음을 지키는 그 하나님의교회가 1964년 안상홍님에 의해 복권됐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7)

인류가 바라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 두 번째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그로 말미암아 2000년 전 사라졌던 하나님의교회가 수복된 것이다. 2000년의 세월 속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도 생겨나며 사라지고 있다. 종교의 홍수 속에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정통 기독교를 만나고 싶다면 처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했던 새 언약 유월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운명 이후 AD 325년 폐지되므로 종교인의 마음에서 사라졌던 유월절. 그 유월절 진리를 가지고 있는 정통기독교가 바로 하나님의교회다.

출처:패스티브닷컴